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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사고 능력을 파악하는 지능검사의 시작

by 가봤 2024. 4. 16.

전체 사고 능력을 파악하는 지능검사의 시작

지능의 실험적 연구 on Double Consciousness>, 알프레드 비네 Alfred Binet. 시어도어 시몽 Theodore Simon (원저 1903)

프랑스의 심리학자이자 의사인 알프레도 비네는 최초로 실용 가능한 지능검사를 만들었다. <지능의 실험적 연구》는 알프레드 비네와 시어도어 시몽, 두 사람의 지능에 대한 논문 5종을 수록한 책이다.

 

 

19세기말 알프레드 비네는 프랑스에서 신흥 학문이던 심리학에 매료되었다.

인간의 사고 과정에 대해 독창적인 연구와 저술을 이어가던 중 1890년 무렵부터 아동발달에 관 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장기간에 걸쳐 아동 연구에 매진했으며, 1905년에는 정부의 요청에 따라 젊은 의사 시몽과 협력하여 아동 심리검사법을 최초로 발표했다. 이것이 지금 까지도 가장 널리 사용되며 신뢰받는 비네시몽 검사법의 원형이다.

 

비네는 지능이 복잡하다고 가정했다. 그래서 주의력, 이 해력, 판단력, 추리력 등 영역에 따라 전체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아이의 사고 전체를 파악하고, 양육자를 면담하는 방 식이 아니라 당사자를 직접적인 검사 대상으로 삼았던 비네의 지능검사는 큰 진전으로 평가받는다.

 

알프레드 비네는 정신분열증 연구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지능의 실험적 연구》에는 그가 이룬 심리학적 업적이 축적되어 있다.

 

지능검사와 지능지수

나는 지능검사와 지능지수에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숫자로 인간을 관리하는 말도 안 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추상적 개념을 측정 가능한 속성으로 바꾸는 소위 '조작 적 정의' 역시 믿지 않았다(예를 들면 지능이라는 개념을 수치화하기 위해, 연구자가 개념을 조작하여 '지능이란 곧 지능검사 점수'와 같이 지능의 조작적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지능검사를 만든 알프레드 비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을 개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생각한 검사주의, 수치지상주의, 측정주의자, 조작적 정의주의자가 아니었다. 아이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아이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해 고민한 인물이었다. 개인적으로 나 는, 비네의 원전을 읽지 않고 지능검사를 무분별하게 시행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세기말 비네는 프랑스에서 신흥 학문이던 심리학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인간의 사고 과정에 흥미를 느꼈는데 아이가 암시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때 프랑 시에는 모든 아이를 학교에서 교육할 수 있는 체제가 마련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집단교육의 학급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도 있어서 행정적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아이들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상에서 어떤 사람이 머 리가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것과 달리 국가가 지체아를 판정하는 일은 훨씬 심각한 일이며 매우 신중해야 한다.

 

| 아이를 전체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검사

얼마나 똑똑한가를 판단하려는 시도는 1879년 심리학이 성립하기 전후에도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스프루자임 J. G. Spurzheim이 창시한 골상학은 머리 모양으로 똑똑한 사람 인지 아닌지 구별했다.

심리학자 제임스 카텔 James McKeen Cattel 은 '멘털 테스트'라는 검사용 키트를 고안했다. 이는 심리학에 실증주의 정신이 반영된 사례로, 실제로 시도해 보고 성공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골상학과 멘털 테스트는 둘 다 실패했다.

초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1905년 비네는 프랑스 정부의 지원 아래 젊은 의사 시몽과 협력하여 종합적 판단을 중시하는 새로운 지능검사를 만들었다. 또한, 아이의 나이를 지적 수준의 기준으로 삼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즉 평균적인 3세 아동이 할 수 있는 일은 '3세 아동 수준', 평균적인 4세 아동이 할 수 있는 일은 '4세 아동 수준'과 같은 기준을 만들었다. 뭔가를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라고 단순히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어떤 아이가 몇 세 아동 수준인지 판단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비네 이전에는 그런 기준을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

 

지능은 복잡하다

비네는 지능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고 가정했다.

그래서 주의력, 이해력, 판단력, 추리력 등 영역에 따라 전체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기존의 실패한 멘털 테스트가 각각의 능력을 개별적으로 측정하려 했던 것에 비해, 비네는 아이의 사고 전체를 파악하는 방법을 추구했다.

비네와 시몽은 먼저 30가지 질문을 준비했다. 다음은 그중 처음 다섯 가지다.

 

 

  • 1. 불타는 성냥을 눈앞에서 움직였을 때 이를 눈으로 쫓아갈 수 있는가(즉, 대상을 응시할 수 있는가?
  • 2. 작은 나뭇조각이 손에 닿았을 때 입으로 가져갈 수 있는가?
  • 3. 먼 곳에 있는 사물을 본 후 그것을 붙잡을 수 있는가?
  • 4. 먹을 수 있는 것(초콜릿)과 먹을 수 없는 것(나뭇조각)을 구별할 수 있는가?
  • 5. 4번에서 이용한 초콜릿을 만졌을 때 초콜릿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가?

 

위의 항목은 2세 아동의 지능 수준이며 성인이 이 항목을 이행하지 못하면 중증 지적장애 판정을 받는다.

 

비네와 시몽은 이 최초의 검사가 대체로 타당하다는 데 힘을 얻어 내용 수정에 임했다.

3세가 할 수 있는 항목, 4세가 할 수 있는 항목을 사전조사해서 설정했다. 이 지능검사는 정신지체아를 변별해 특수교육을 받게 하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비네 이전에는 적절한 검사가 없었던 탓에 당사자가 아 니라 부모를 면접해서 아이의 지적 수준을 추정했다.

당사자를 대상으로 한 비네의 지능검사는 큰 진전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비네가 개발한 지능검사는 아이를 유심히 관찰해 그 실태에 맞춰 교육하도록 한다는 원래 의도와 다른 형태로 발전했다.

비네의 지능검사를 변질시킨 가장 큰 원인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 1916년 미국의 심리학자 루이스 터먼 Lewis M. Terman이 비네의 검사를 기초로 스탠퍼드 비네 검사를 표준화하면서 지능 검사 결과를 지능지수라는 수치로 나타냈다. 이것이 현대식 IQ 테스트의 전신이 되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단시일 내에 대규모 병력을 선발하고자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집단식 지능검사를 시행했다.

그 결과, IQ가 낮은 사람들은 이민을 배제하거나 강제 불 임시술을 시행하기도 했다. 비네가 의도한 바와 정반대의 결과였다.

지금도 지능검사는 세계 곳곳에서 너무도 손쉽고 흔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능검사를 하려거든 적어도 비네의 정신을 알았으면 한다.

 

심리학에 정신분석을 연결하다

<정신분석학 입문 vorlesungen zur Einführung in die Psychoanalyse》,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원저 1916~1917)

《정신분석학 입문》은 마르크스 Karl Marx,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과 더불어 '20세기 사상의 거장'으로 불리는 프로이트의 전반기를 총정리한 책이다. 프로이트 이론에 들어설 때 맨 먼저 선택해야 할 입문서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신경해부학, 신경생리학 분야에서 놀라운 업 적을 쌓으며 연구활동을 시작했다. 1873년 빈 의과대에서 생리학을 전공한 그는 1885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이후 히스테리 환자들을 치료하며 심리와 신체 관계의 문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를 토대로 1896년 '정신분석'이라 는 이론을 정립했다. 처음에는 신경증 환자들의 정신을 탐구하면서 그들을 치료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곧 정신분석학 은 정신 전반에 관한 지식을 탐구하는 매개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의 정상적인 성적 발달 단계를 설 명하고 주로 꿈의 해석에 근거해 인간의 일상적인 생각과 행 위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힘을 발견해 냈다. 인간의 정신을 분석하기 위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도구를 최초로 찾아낸 인물이 바로 프로이트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발달 이론, 자아 이론, 신경증 치료법 등이 하나로 묶여 이론을 형성했기 때문에 심리학과 긴밀하다.

훗날 에릭 에릭슨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아이 덴티티 이론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발달심리학에도 기여했다.

 

프로이트의 전반기를 망라한 책

《정신분석학 입문》은 '20세기 사상의 거장'으로 불리는 프로이트의 전반기를 총정리한 책이다.

1916~1917년 빈대 학 의학부에서 실시한 정신분석 입문 강의를 출간한 것으로 총 3부, 28개 강의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정신분석의 기본 구조가 완성되었고 그 후 원만한 수정과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책이 출간된 지 15년 후 개정증보판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원래 세 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때까지의 프로이트 학설을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세 가지는 '착오 행위(실수)', '꿈', '신경증(노이로제)'이 다. 프로이트는 착오 행위, 꿈, 신경증이 연속되면서도 질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쉽게 물을 예로 들어 보자.

 

'H2O'는 온도가 변화하면 얼음, 물, 수증기 상태로 변화한 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상전이라고 한다. 물질이 양적으로 변화할 뿐만 아니라 기체, 액체, 고체라는 질적 변화를 동반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착오 행위', '꿈', '신경증'은 얼음과 물, 수증기처럼 서로 다른 것이면서도 연속한다고 이 해할 수 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실수와 꿈

'착오 행위'의 예로 말실수를 들 수 있다. 프로이트는 절 대로 실수하면 안 된다고 의식하는데도 발생하는 말실수는 단순한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회의석상에서 의장 이 개회 선언하는 상황을 예로 들었다. "지금부터 ㅇㅇ 회의를 개최하겠습니다"라고 단순히 선언하기만 하면 되는데 "지금부터 폐회하겠습니다"라고 정반대의 말을 내뱉었다면 어떨까?

 

프로이트의 주장에 의하면 착오 행위는 대립하는 심적 의향 사이의 갈등이 표출된 것이며, 불쾌감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동기라고 한다. 회의 시작 순간에 '폐회'라 고 말실수를 했다면, 의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마땅히 해야 한다는 공적인 의향과 부담스러운 자리를 피하고 싶은 이면의 의향이 서로 갈등을 일으켜 말실수(착오)가 생겨난 것이 라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또 한 가지 독창적인 관점은, 꿈이라는 현상에 심리학적 분석을 반영한 것이다.

꿈은 우리가 일상생활에 서 충족시키지 못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일어나는데, 여 기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대부분 성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꾸는 꿈은 앞서 설명한 실수와도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 무의식이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을 제어하려는 자아 그 충돌 과정에서 꿈이라는 결과가 빚어진다.

 

프로이트는 우리에게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종류의 정신(영혼)이 있다고 제시한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무의 식적 영혼은 성적이고 파괴적이며 충동과 욕구를 포함한다. 정상인은 두 정신을 조화시킬 수 있지만, 신경증 환자는 둘 사이의 균형을 잃어 병든 상태가 된다.

 

의사였던 프로이트는 신경증 치료에 관심이 있었다.

착오 행위나 꿈에 주목한 것도 신경증의 이해와 치료 때문이었다.

 

재미있게도 <정신분석학 입문》의 차례 구성은 프로이트 가 직접 연구해 그 성과를 공표한 것과 정반대의 순서를 따른다.

실제로는 신경증 치료에서 시작해 꿈에 주목하고 그 후 일상적인 실수 행위에도 시선을 돌렸다.

 

프로이트에 와서 신경증 연구는 혁명적인 전환을 맞게 되었다.

이전의 전통적인 정신의학에서는 신경증을 신경 생리학적 질병으로 간주했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연구를 통해 신경증 증상의 상징적, 심리적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과학적, 의학적 담론과 구분되는 새로운 학문을 창시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신경증은 병리적 현상이지만 정상적인 사람에게도 흔히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두 경우의 차이는 일상생활에 쓰는 에너지의 양적 문제일 뿐이며 질적 문제는 아니므로 신경증 환자는 '치료될 수 있다'라 고프로이트는 확신했다.

 

|프로이트 이론의 매력

프로이트의 생각은 소모임에서 시작되었는데 처음부터 지지받은 것은 아니다.

 

1902년 이후 프로이트는 자택에서 수요심리학회라는 모임을 열었는데 훗날 이 모임은 빈 정신 분석협회로 발전했다.

알프레드 아들러 Alfred Adler는 처음부 더 열심히 활동한 참가자였다.

 

조발성 치매 대신 스키조프레 니아 schizophrenia (조현병)라는 용어를 주창한 오이겐 블로일러 Eugen Bleuler도 동료로 참여했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높이 평가했으며 칼 융을 소개하기도 했다.

 

융은 자유연상법과 실험심리학을 융합한 언어연상법을 연구해 콤플렉스(심적 복잡성) 연구를 진행했다.

 

1908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아들러, 프로이트, 융 등 42명이 모인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가 열렸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유럽에서는 프로이트의 생각에 비판적이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출신지인 유럽이 아닌 미국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때까지 노이로제란 몸 어딘가 문제가 있거나 악마에게 사로잡혀 증상이 생긴다고 여겼다.

몸의 어딘가, 이를테면 자궁이 원인이라 생각해서 히스테리 환자의 자궁을 적출하는 수술을 감행하기도 했다.

히스테리 증상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는데 여성에게만 있는 기관이라 한다 면 곧 자궁이라고 단순히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 문제에 심리 구조를 통해 접근하고자 했다.

현실 속에서 자아가 겪는 갈등을 이성적이고 자 의적인 방법으로 통제할 수 없을 때, 심리적 상처를 막고자 현실을 거부하거나 왜곡하여 지각함으로써 불안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이 방어기제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신경증이라는 정신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프로이트가 활약한 19세기말 빈에서는 목 아래쪽의 신 체 부위를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천박하다고 여겼다.

특히 여성은 성적 표현을 할 수 없었다. 반면에 남성은 지금보다 도 더 독선적으로 성적 행동을 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 직 접적, 간접적 피해는 고스란히 여성들에게로 돌아갔다.

 

프로이트는 여성이 성적인 일로 문제를 겪더라도 드러내 어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억압 등의 방어기제가 작동해 신경증(노이로제)이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프로이트의 사상을 가부장적이고 여성차별적이라는 시선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개방적이 고 진취적이었던 셈이다. 그는 여성의 정신적 문제와 장애에 과학의 칼날을 댔고 성행동과 성욕의 의미를 개방적으로 논 의할 수 있도록 포문을 열었다.

 

20세기 새로운 인간관을 만들다

미국 존스홉킨스대에 최초의 심리학 연구실을 설립한 그랜빌 홀은 클라크대 창립과 함께 학장이 되었고 1909년 클라크대 20주년 기념 콘퍼런스에 프로이트와 융 등을 초빙해 강연을 의뢰했다.

 

독일어로 진행된 강연이 미국 심리학 잡지에 영어로 번역되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생후 양육 환경을 중시하는 프로이트의 관점은 유전을 근거로 하던 그때까지의 주장과 확연 히 구별되었다. 프로이트의 사상은 인간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신대륙 미국을 사로잡았다.

 

일반적으로 행동주의와 정신분석을 물과 기름으로 생각하지만 인간의 생후 경험, 환경을 중시한다는 점은 서로 일 피한다. 이 두 이론은 20세기 새로운 인간관을 형성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발달 이론, 자아 이론, 신경증 치료법 등이 하나로 묶여 큰 이론을 형성했기 때문에 심리학과 융합하기 쉬웠다. 훗날 에릭 에릭슨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아이덴티티(자아동일성) 이론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발 달심리학에도 기여했다. 또한, 프로이트의 신경증 치료법은 약물을 쓰지 않는다는 특징 때문에 의학이나 의료보다 심리 치료와 더 관계 깊은 영역으로 다루어지곤 한다.

 

인간의 유형을 제시하다

 

심리학자이자 정신의학자였던 칼 구스타프 융은 프로이 특가 말한 억압을 입증하고 이를 '콤플렉스'라고 명명했다. 콤플렉스라는 개념은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에서 빈번히 사용되었고 융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07년 이후 융은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와 공동 작업을 하면서 그의 후계자로 더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는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성적 에너지에 국한하지 않고 일반적인 에너지라고 주장한 끝에 갈등을 빚어 결국 결별했다. 이때 독자적으로 무의식 세계를 연구해 분석심리학을 창시했다. 《심리 유형은 마음의 기능을 중시해 독자적인 분석심리 학 체계를 만들어낸 책이다.

 

융은 인간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관계 등 외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자신의 주체 등 내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구분했다. 이런 내향과 외향 이분법에 더해 네 가지 심적 기능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감각, 사고, 감정, 직관이다. 융의 주장에 따르면 사고와 감정은 대립하는 존재로 공존할 수 없고 감각과 직관도 대립한다.

 

이렇듯 융은 인간의 내면에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고 믿었다. 집단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각 개체의 통합을 도모하게 하는 자아 원형이 있다고 주장했다. 집단 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해 신화학, 연금술, 문화인류학, 종교학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융과 프로이트의 대립

1912년 칼 융이 《변용의 상징 Wandlungen und Symbole der Libidoy을 발표하는 바람에 프로이트와 융 둘 사이의 대립은 회복 불가능해졌다고 전해진다. 프로이트와 융은 무의식에 대해 서로 확고한 생각 차이를 보였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억압을 일으키는 유일한 기제를 성욕이라고 간주했다.

 

'욕망'이라는 의미의 리비도 Livido에 대해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적 삶에 작용하는 성충동이라고 말했지만, 융은 이것을 훨씬 더 넓은 의미의 정신적 에너지로 보았다. 무의식이라는 '없는 존재'를 두고 대립하는 것이기 에 둘 사이의 골은 깊어지기만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융은 1900년 스위스 바젤대 의학부를 졸업했는데, 마침 그해에 출간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Die Traumdeutung》을 읽었다.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단어 연상 연구(피험자는 검 사자가 불러주는 단어를 듣고 처음 떠오르는 단어로 반응한다. 이 를 통해 융은 개인의 무의식을 파악하고자 했다-옮긴이)를 여러 해동안 수행한 후인 1905년 이 책을 다시 읽고서 비로소 이해했다고 한다.

 

1907년 융은 프로이트를 처음 만났다.

첫 만남에서 무려 1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눌 정도로 서로에게 끌렸다. 융은 ㅍ 로이트의 천재성을 인정해 주었고 프로이트는 융을 각별한 관계로 생각하며 아들처럼 아꼈다. 그러다 1909년 미국 클라크 20주년 기념 콘퍼런스에 초대를 받고서 두 사람은 함께 7개월에 걸친 강연 여행을 떠났다. 대서양을 배로 가로지른 이 긴 여행 동안 둘의 관계는 틀어지고 말았다.

 

1910년 국제정신분석학협회가 설립되자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아리아인인 융을 회장에 선임했지만 강연 여행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던 둘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고 1911년 이론적으로 명확히 대립했다. 그리고 1912년 융이 변용의 상징》을 발표한 이듬해 둘의 관계는 파국을 맞았다. 융은 그 후 방향을 잃고 일시적으로 학문적, 정서적 고립에 빠졌다. 한편으로 융에게 이 시기는 무의식 세계를 향한 본격적인 탐 사에 돌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차이에서 찾은 이론

 

1921년 융은 <심리 유형>을 발표하며 부활했다. 그는 프로이트와의 관계가 끝난 후인 1913년 9월 '심리적 유형에 대한 문제'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그 내용을 오랫동안 정리하지 못하다가 프로이트와의 결별로 인한 심적 타격을 8년에 걸쳐 치유한 결과로 마침내 이 책을 내놓았다.

 

여기서 융은 정신분석의 근본 개념인 리비도라는 에너지 가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이 있다고 주장했다. 흥미 곱게도 이 차이는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대립에서 찾아낸 것이다. 아들러는 프로이트의 문하생으로 개인심리학을 정립 한 인물이다. 그는 융보다 한발 먼저 프로이트에게 반기를 들었다. 융은 그들이 대립하는 모습을 보고 그 사이에서 흔들렸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처음 발표했을 때는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했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자택에 서 수요 모임(수요심리학회)을 열었는데 초기부터 이 모임에 참석한 인물이 아들러였다. 1911년 프로이트와 결별하고자 유정신분석학협회를 결성하기까지 아들러는 초기의 정신분 석학을 뒷받침했다. 아들러는 유년기부터 허약했는데 구루 병 때문에 키가 작은 열등감에 갇혀 살았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열등감을 억압하거나 다른 것에 있는 힘을 쏟는 현상 (보상)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개인을 더 분류할 수 없는 존재로서 전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려 했다.

 

초기에 아들러는 《꿈의 해석》을 높이 평가하며 프로이트의 동료가 되었지만 프로이트가 성적 에너지(리비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데 비해 아들러는 주체가 가진 힘의 행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둘의 방향성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 차이는 히스테리 환자의 예를 해석하는 데도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한밤중에 남편에게 "날 버리지 말아 요!"라며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히스테리 환자에 대해 프 로이트는 아버지에 대한 성적 고착이 왜곡되어 나타났다고 보았지만 아들러는 그 환자가 스스로 소란을 피워 주위의 행 동을 지배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았다.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심각한 대립 사이에서 애태우면서 도 융은 어느 한쪽만 옳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히스테 리의 서로 다른 측면을 본 것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견해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융은 프로이트의 리비도 중시가 내적 욕망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환자의 경우 아버지, 남편과의 관계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아들러의 지배력 중시는 타 인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환자의 경우는 자신의 권력지향을 나타낸다고 해석했다. 융은 더 깊이 파고들었다.

 

타인, 대상, 관계를 중시하는 프로이트와 주체, 내면의 동기를 중시하는 아들러의 차이는 둘의 인간성 차이를 보여준다

 

융은 인간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관 계 등 외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자신의 주체 등 내면에 관 심이 있는 사람으로 구분했다. 에너지가 외면으로 향하는 외 향형과 에너지가 내면으로 향하는 내향형. 이 두 가지 인간의 원형을 두 선배 학자에게서 발견했다.

 

| 내향과 외향 이분법

1913년 1월, 융은 사제 관계이자 공동 연구자이며 전우처럼 일체화된 관계였던 프로이트와의 관계를 끝맺는 편지를 썼다. 그 후 학문적 침체기가 이어졌는데 그 초반이던 1913 년 9월, <심리 유형>의 원형이 된 강연 '심리적 유형에 대한 문제'가 열렸다.

융은 프로이트와 함께 참석했던 클라크대 콘퍼런스에 서 윌리엄 제임스를 처음 만났다. 그의 학설에 영향을 받아 1913년 강연에서 윌리엄의 이론을 소개했다. 윌리엄 제임스의 주장에 의하면 철학의 역사는 합리론과 경험론이 대립해 서 이루어진다. 그는 이런 대립이 철학자 자신의 성질을 반 영하며 유연한 마음과 굳은 마음의 대립이라고 주장했다.

 

합리론적 철학을 전개하는 사람은 '주지주의적, 관념론적, 낙관적, 종교적, 비결정론적, 일원론적, 독단적'이며 '유연한 마음'의 소유자다. 경험론적 철학을 전개하는 사람은 '환원 적, 감각적, 유물론적, 비관적, 비종교적, 결정론적, 다원론적, 회의적'이며 '굳은 마음'의 소유자다. 제임스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론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주장하는 이론에 당사자의 인품이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융은 내향과 외향의 이분법에 더해 네 가지 심리적 기능 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바로 감각, 사고, 감정, 직관이다. 감 각은 어떤 일이 존재하는 것을 짚어내고 사고는 그것이 무 것인지 알려준다. 감정은 현시점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직관은 그 미래를 알려준다. 융의 주장에 따르면 사고와 감 정은 대립하므로 공존할 수 없고 감각과 직관도 그렇다. 그러므로 직관이 뛰어나다는 말은 감각이 뒤떨어진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내향과 외향이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유형에 네 가지 심 이적 기능을 곱하면 여덟 가지가 된다.

유형론은 개인을 특정유형으로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진 기능을 풍부하게 만들어 자기실현을 돕는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유형 론의 심리적 기능은 의식을 대상으로 하며, 정신분석에 특징 적인 무의식적 과정을 다루지 않는다(융은 무의식에도 형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해 원형 Archtype이라고 이름 붙였다).

 

단순한 것이 복잡성을 끌어낸다

 

초기의 융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연상실험, 단어 연상 검사다. 피실험자에게 단어 100개를 제시해 연상되는 말을 답 하게 하는 방법이다.

검사는 2회 반복한다. 제시어에는 머리, 녹색, 물, 노래하다, 죽음, 길다 등의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만약 산이라는 단어를 듣고서 강이라고 답했다거나, 개라는 단어를 듣고 고양이라고 바로 답했다면 산이나 개에 대 해 아무 생각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개라고 답했을 때 잠시 시간을 두고 '순종'이라고 한다면?

혹은 '순종'이라고 대답하 고는 그다음에 잊어버린다면? 개와 관련된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원리를 이용해 범인을 찾는 데 적용한 것이 바로 거 지말 탐지기다. 어느 방에서 지갑을 도둑맞았다고 가정하자. 그 방은 입구, 창문, 천장, 바닥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제 용의자들에게 범인의 침입 경로를 들려준다. '범인은 창문을 로 침입했습니다', '범인은 천장으로 침입했습니다'라는 문장을 들었을 때 진범 외에는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진범이 정 말 창문으로 침입했다면? 그 문장을 들을 때 특정 반응이 일 이날 것이다(물론 실제 허위 검출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융의 단어 연상 검사는 단순하지만 단순하기 때문에 복잡한 것을 들춰낼 수 있다.

그 밖에도 융은 연금술에 관심이 있었다. 다만 연금술사가 물질적인 금을 바라고 만드는 사람이라 여기지는 않았고 금을 합성하는 과정에서 진짜 자아를 연성한다고 생각했다.